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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부터 양주 '온릉' 일반인에게 공개 "온릉"?

ko.konene 발행일 : 201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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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릉은 제11대 중종의 여러 부인 가운데 첫 번째 부인이었던 단경왕후 신 씨의 능이다. 미공개 왕릉인데다 다소 외딴 지역에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39번 국도와 인접하며 교외선 온릉역과 장흥역 사이에 있어 찾아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단, 서오릉에 있는 문화재청 조선왕릉서부지구관리소에서 사전에 허가를 받고 방문해야 한다.

단경왕후는 성희안, 박원종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박원종은 연산군의 신임이 두터워 도부승지, 좌부승지, 경기관찰사 등을 거치며 국가의 재정을 주로 맡았다. 그러나 연산군이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부인인 자신의 누이를 궁으로 불러들여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들리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단경왕후가 폐출되는 연유는 매우 복잡하다. 단경왕후는 12세 때 성종의 차남인 진성대군(중종)과 가례를 올렸다. 그런데 진성대군의 형인 연산군이 반정으로 폐위되자 19세 나이에 진성대군이 왕으로 옹립되면서 왕비가 된다.

 

 

 

단경왕후는 '죄인의 딸'로 낙인찍혀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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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왕비의 부친 익창부원군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 편에서 중종반정을 반대하는 것이 문제였다. 반정이 일어나기 전 우의정 강귀손이 반정 계획에 동조한 후 좌의정이었던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 중에 누가 더 가까우냐"라고 묻자 신수근은 "매부 연산군을 폐하고 사위인 진성대군을 세우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그 뒤에 박원종이 신수근과 장기를 두면서 궁을 바꾸어 폐립1) 의 뜻을 보이니 신수근이 장기판을 밀치며 자신의 머리를 베라고 반발했다. 박원종은 신수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장사로 알려진 신윤무를 보내 그를 수각교에서 살해했다. 누이와 딸 중 누이를 택한 것이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중종이 왕이 된 날에 얽힌 일화가 있다. 연산군이 폐위되자 곧바로 군사들이 진성대군의 집을 둘러쌌다. 누군가 진성대군을 해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호위 차 보낸 것인데 진성대군이 그런 연유를 모르고 자결하려고 하자 신 씨가 말했다.

"군사의 말 머리가 궁 쪽으로 향해 있으면 우리 부부가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리까. 그러나 만일 말 꼬리가 궁으로 향하고 머리를 밖으로 향해 섰다면 반드시 공자(公子)를 호위하려는 뜻이니 이를 알고 난 뒤에 죽어도 늦지 아니하오리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고 오니 과연 말 머리가 밖을 향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단경왕후가 왕비가 되자 곧바로 반정 공신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죄인의 딸은 왕비로 부적절하다며 단경왕후의 폐위를 요청한 것이다. 결국 중종은 종사가 중하니 사사로운 정을 생각할 수 없다며 왕비를 책봉 7일 만에 폐출하라는 명을 내린다.

단경왕후는 폐출되자마자 세조의 사위인 정현조(영의정 정인지의 아들)의 집으로 쫓겨났다가 본가로 돌아갔다. 이때 나이 20세로 그녀는 71세에 죽을 때까지 자식 한 명 없이 중종의 사랑이 되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중종이 즐겨 타던 말을 보냈더니 단경왕후가 왕을 보듯이 쌀죽을 쑤어 먹였다는 일화도 있고, 중종이 단경왕후의 집 쪽을 바라보며 그리워하니 단경왕후는 분홍치마를 바위에 걸쳐놓아 화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이다.

하지만 이런 일화도 있다. 계비인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6일 만에 죽자 신하들 사이에서 단경왕후를 복위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그러나 중종은 이를 물리치며 오히려 건의한 사람들을 유배 보냈다. 더불어 장경왕후 곁에 묻히고 싶은 마음을 토로하며 쌍릉 자리를 마련하라고까지 했다.

그래서 중종의 능은 처음엔 장경왕후의 희릉 곁에 조성되었지만, 제2계비인 문정왕후에 의해 강남구 삼성동으로 천릉되어 정릉이 되었다. 중종에게 단경왕후는 잊혀져버린 여인이었던 것이다.

1698년 숙종은 연경궁 내에 사당을 세워 춘추로 제사지내게 하고 한식에는 묘제를 지내게 했다. 1739년 영조는 다시 그녀를 왕후로 복위하며 익호를 단경, 능호를 온릉으로 추봉하고 정릉과 사릉의 상설을 따랐다.

정려문에서 참도를 통해 전면으로 정자각이, 우측으로 비각이 보이며 정자각은 익공식 맞배지붕이다. 병풍석과 난간석이 생략되었으며 곡장 내에 석양, 석호 각 1쌍을 배치했다. 봉분 앞에 혼유석 1좌, 양측에 망주석 1쌍을 세웠고 망주석의 세호는 우주 상행, 좌주 하행의 원칙에 충실하다. 동물 석상을 절반으로 줄인 것은 추봉된 왕비 능의 예에 따른 것이다.

한 단 아래 무인석은 생략했고 문인석만 한 쌍 있는데 장명등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문인석은 공복을 입고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했던 복두를 썼으며, 홀을 쥐고 있다. 전체적으로 상체가 크고 하체가 짧은 4등신인데 이는 숙종·영조 대의 조각 형태라 볼 수 있다. 장명등은 낮은 하대에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화사석이 사각으로 소박한 인상을 준다. 석양은 배 부분이 불룩하게 나왔으며 석호는 복슬강아지를 닮은 귀여운 모습으로 꼬리가 S자 곡선을 그리며 등줄기 가까이 올라간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61XX11500033

 

온릉

온릉은 제11대 중종의 여러 부인 가운데 첫 번째 부인이었던 단경왕후 신 씨의 능이다. 미공개 왕릉인데다 다소 외딴 지역에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39번 국도와 인접하며 교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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