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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전 비화가야 '비사 담은 무덤' 발견 '학계가 들썩'

ko.konene 발행일 :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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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가야 최고 지배층의 묘역인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한번도 도굴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의 무덤 내부가 공개됐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이하 연구소)는 28일 경남 창녕군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 일원에 대한 학술 발굴조사 결과 한번도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추정되는 63호분의 뚜껑돌 7개 중 2개를 들어 올려 내부를 공개했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고대 6대 가야국 중 하나인 비화가야의 최고 지배층 묘역으로 연구소는 지난 2014년부터 학술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앞선 조사에서 5세기 중반경의 봉토분 9기, 돌덧널무덤(석곽묘) 15기 등 총 24기의 고분 조사 결과, 벽에 나무기둥을 세워 축조하는 방식 및 봉토가 서로 가까이 축조되는 연접 방식 등을 확인한 바 있다.

문화재청은 2016년부터 5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조성된 곳으로 보이는 고분군의 동쪽 상단 부분에 대한 조사를 하고 봉토분 4기(39호분, 63호분, 38호분, 62호분)를 확인됐다

 

https://www.nocutnews.co.kr/news/5251531

 

1500년 전 비화가야 비사 담은 무덤 열렸다

비화가야 최고 지배층의 묘역인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한번도 도굴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의 무덤 내부가 공개됐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이하 연구소)는 28일 경남 창녕군 교동과 송현동 고..

www.nocu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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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가야>

경상남도 창녕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가야제국의 하나인데, 비자벌(比子伐)·비자발(比自鉢)·불사국(不斯國) 등으로도 불리었다.

 

비화가야(非火伽耶)는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지역에 비정되는 옛 가야국의 국명이다. 『삼국유사』 기이1 오가야(五伽耶)조에서 인용하고 있는 “「본조사략(本朝史略)」에 고려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940)에 오가야의 명칭을 고쳤는데, “비화가야.[지금의 창녕이니 아마 고령의 잘못인 듯하다]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비화가야를 나타내는 다른 이름은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의 “비자벌(比子伐)”과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神功) 섭정(攝政) 49년조에 나타나는 “비자발(比自鉢)”과 『삼국지(三國志)』 한(韓)전 변진(弁辰) 기사에는 “불사국(不斯國)”으로 나타나고 있다.(천관우, 1991)

“비(比)”, “불(不)”, “비(非)”는 모두 빛(光)이라는 우리말을 한자화한 것이다. 그리고 “화(火)”, “벌(伐)”은 삼국시대에 성·촌·읍을 의미하는 신라의 명칭으로, 들판의 의미를 가지는 “벌”과 “들”을 한자화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비사벌, 비자벌, 비화 등의 표기는 “빛벌”이라는 순수 우리말을 한자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백승옥, 2003)

창녕지역은 낙동강 이동에 위치하여 다른 가야제국들이 낙동강 서쪽에 주로 위치한 것과 지리적 차이가 난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볼 때 5세기 후반 이후로 이 지역에는 신라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기 때문에 비화가야가 가야 7국중에 하나로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2001)

또한 이 지역은 『일본서기』의 5세기 중엽 이후 기사 중에는 가야국 중에 비자발만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하여 신공기 49년조의 연대를 180년 인하하여 비자발과 관련한 기사를 492년의 사실로 보거나 그 내용이 후일 백제 성왕대의 사실을 근거로 소급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6세기에 신라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기록에서 사라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박천수, 1993)

6세기에 신라에 귀속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가야 지역 국가들의 자주성 회복운동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관계 속에서 가야제국은 서서히 붕괴되었으며, 비자벌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6세기전반기 신라에 귀속되었고, 555년 신라의 하주(下州) 설치로 인해 완전히 멸망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특히 비자발은 전략적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좀더 일찍 주변국들의 선점 대상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백승옥, 2003)

이와 다르게 5세기대로 보는 견해는 1-3세기에 창녕지역은 불사국이 되었고, 진한연맹체의 한 구성체로 존재하였으며, 3세기말에서 4세기초 변한에서 가야사회로 전화되었다고 보았다. 이때의 국명은 비자발로, 이 이름이 후일 비화가야로 불리게 된 역사적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이후 창녕지역은 백제가 이 지역을 평정할 때 평정 대상의 하나로 되었으나 자신의 국명을 가지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립하다가 5세기 후반 이후의 어느 시기에 신라영역으로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박천수,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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