냅코프로젝트 1945년 군사작전 어떤 작전이었나?
개설
한반도침투계획을 기획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전략첩보국)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중이던 1941년 7월 11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령으로 설립된 COI(Coordinator of Information: 정보조정국)를 발전시켜 1943년 6월 13일 조직된 미국 정보기관이다. OSS는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럽과 아시아에서 활약하였고 종전 후에는 일시적으로 기능이 군과 국무성에 분할되었다가 1947년 다시 CIA(중앙정보국)로 재현되었다.
OSS는 재미 한인 중 민간인과 군인, 미국 내 포로수용소 출신의 한인 포로, 버마에서 탈출한 학병출신 한인 등을 모집해 ‘냅코프로젝트(Napko Project)’란 이름의 한반도침투작전을 추진하였다. 이를 통해 한반도는 물론 일본 본토까지 교란시켜 미일전의 승리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역사적 배경
OSS가 군사측면에서 한국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COI 때부터다. 미국 정보기관의 효시가 되는 COI는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인 1941년 9월부터 중국을 통한 대일정보 수집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담당할 적임자로 게일(E. M. Gale)을 선정했다. 게일은 한국통인데다 이승만에 대해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게일은 사절단을 이끌고 중경 지역 한인들을 이용한 비밀정보와 사보타지 체제 구축을 목적으로 1942년 2월 뉴욕을 출발해 그 해 3월 중경에 들어갔다. 그런데 중국 국민당정부의 정보책임자인 대립(戴笠)의 반발로 성과를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게일사절단의 중국 활동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이를 계기로 중국 및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을 이용한 특수작전의 필요성, 게릴라부대의 창설 등에 관한 일련의 계획이 쏟아졌다. 이것은 이후 OSS의 대중(對中) 및 대한(對韓) 작전을 수행하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한편 COI는 1942년 3월 최초의 특수부대인 101지대를 창설하고 1942∼43년 버마와 중경을 오가며 첩보 및 정보 수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 COI는 대일 특수전 수행을 위해 12명의 재미 한인들을 선발해 그 중 9명을 직접 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추진은 단편적이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OSS는 1942년 1월 중국을 우회한 한반도침투계획(올리비아계획: Scheme ‘Olivia’)에서 출발해 1942∼1944년 COI의 특수부대인 101지대의 활동 경험 등을 통해 1944년 중반부터 대일전 승리를 위한 방안을 다각적으로 연구하고 중국 전구를 토대로 한국인들을 이용한 한국·만주·일본 본토에 대한 침투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대한 일련의 성과로 중국전구 OSS는 독수리작전(Eagle Project), 화북작전(North China project), YENZIG4작전, 불사조작전(Phoenix Project), 칠리미션(Chilli Mission) 등의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가운데 독수리작전은 한국광복군 제2지대와 제3지대를 중심으로 한미 연합에 의해 무전훈련, 유격훈련, 폭파훈련 등의 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 훈련의 목표는 한반도로 침투해 통신망을 구축하고 궁극적으로 일본 본토로 진입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경과
OSS의 워싱턴 본부는 1944년 말∼1945년 초에 냅코프로젝트라는 계획을 구체화 시켰다. 이것은 재미 한인들을 훈련시켜 공중 혹은 잠수함으로 한국에 침투시키기 위한 특수작전이었다. 이같은 계획은 OSS의 부책임자 굿펠로우(Preston M. Goodfellow)의 제안과 101부대 책임자 아이플로(Carl Eifler)의 실행으로 구체화 되었다.
아이플로 대령이 OSS 도노반(William J. Donovan) 국장에게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냅코프로젝트의 목적은 “한국 내 당장 침투할 수 있게 준비하고, 궁극적으로 일본에 침투하여 첩보 지하조직 조성 등의 활동을 하고, 사보타지와 무장 저항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위해 1조에 5명 이내 10조의 공작원을 파견하고 체포와 고문으로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 매조의 인원은 다른 조의 인원을 서로 모르게 훈련시킨다는 것이었다. 공작원들이 한국에 상륙할 때는 1500엔(1만 5000달러)을 소지해 활동하게 하고 잠입은 잠수함을 이용하고 반일감정이 농후한 지방을 선택해 지하훈련소를 만들고 무장 유격활동을 전개한다는 방침이었다. 공작원의 침투는 인천 앞바다 섬들을 통한 서울 침투, 진남포 경유 평양 침투, 평남 농촌 침투, 충남 서산 침투, 진남포 경유 황해도 침투, 전남 목포 앞바다의 목포 침투 등 여러 조를 계획하였다.
OSS 워싱턴 본부는 COI의 1기생으로 특수부대 101지대 출신 장석윤(張錫潤)을 1944년 7월 17일 차출하면서 냅코프로젝트에 구상을 실행했다. 장석윤은 특수공작에 대한 경험이 풍부해 이번 작전 수행의 적임자였고 위스콘신주 맥코이(McCoy)포로수용서의 한인 포로 가운데 공작원을 확보해 냅코프로젝트를 구체화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다음 미군에 입대해서 전쟁성의 군용어학원을 다닌 변일서(邊日曙)와 이태모(李泰模), 미 육군에 입대했던 이초와 차진주(車眞宙, James C. Charr), OSS의 중국·버마 지역에서 활동한 박기벽(朴基闢)이 주요 인물로 차출되었다. 장석윤과 박기벽은 이후 새로운 한인들을 모집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 6명 외 냅코프로젝트에 참가한 한인들은 김강(金剛, Diamond Kim), 김필영, 김현일, 박순동(朴順東), 박형무(朴亨武), 변준호(卞埈鎬), 유일한(柳一韓), 이근성(李根成), 이종실(李鍾實), 이종흥, 최진하(崔鎭河), 최창수(Stanley D. Choy), 하문덕이다. 아직 파악되지 못한 한인들이 더 있을 수 도 있지만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총 19명이다. 19명 중 김강, 변준호, 이근성, 유일한, 최진하는 재미한인사회의 중추적 인물이다. 이들은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이번 작전에 참가하였다. 김필영, 김현일, 이종흥은 황해도 출신의 노무자이자 맥코이포로수용소의 한인 포로이다. 박순동, 박형무, 이종실은 일본 군대에서 탈출해 영국군에 투항한 학병 출신이다. 이들 학병 출신자들을 통역으로 도운 최창수와 하문덕은 OSS 출신이다.
이상의 인물들을 연령별로 분류하면 20대 3명, 30대 8명, 40대 6명, 50대 2명이고 이들 중 기혼자는 13명, 미혼은 6명이었다. 즉 대부분 중장년인데다 안정된 가정을 누릴 만한 연령과 계층의 인물들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참여하였다.
냅코프로젝트의 훈련소는 남캘리포니아주의 산타 카타리나 섬의 Howland`s Landing과 Forth of July Cove라는 곳에서 2조를 훈련시키고 다시 다른 8군데를 확정하였다. 공작원의 교육 내용은 사격, 비무장 전투법, 지도 읽기, 파괴, 무전, 촬영, 낙하산 훈련, 비밀 먹 사용법, 선전, 일본인의 특성 교육 등이었다. 공작원의 훈련은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진 4개조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먼저 아이넥조(Einec Mission)는 유일한(조장), 이초, 변일서, 차진주, 이종흥으로 구성했고, 서울 침투를 목표로 하여 주로 경제상황과 일본군 부대의 주둔 위치를 파악해 보고하는 임무를 가졌다. 차로조(Charo Mission)는 이근성, 김강, 변준화로 구성하였고 진남포 경유 평양 침투를 목표로 훈련을 받았다. 무로조(Mooro Mission)는 1945년 5월 맥코이포로수용소의 한인 포로 중 황해도 출신 노무자 김필영과 김현일로 편성되었고 그밖에 학병 출신 한인포로 박순동, 박형무, 이종실이 이 무로조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무로조의 임무는 황해도 앞바다의 작은 섬으로 진입해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45년 6월 23일 차모조(Chamo Mission)가 새로 편성되었다. 차모조는 이근성, 김강, 변준호, 하문덕 등 4명을 함흥 인근에 투입하여 이근성과 김강은 평양에서 지하조직을 만든 후 서울로 가 일본 침투 공작원을 선발하고, 변준호와 하문덕은 함흥 인근의 계곡에 비행기 이착륙용 활주로와 공작원양성소를 설립해 흥남으로 진출하는 것으로 임무를 부여하였다. 차모조는 당초 계획한 차로조의 임무가 약간 전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4개조의 공작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침투지점과 방식, 공작원의 수와 구성 등에서 변화를 겪었다. 아이플러의 구상은 당초 10개조를 한국에 침투시킬 계획이었는데 이 가운데 7개 조가 성공하고 나머지 3개 조는 체포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냅코프로젝트에 참여한 한인 공작원들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산타 카탈리나섬 안에서 고되고 힘든 훈련을 3∼4개월 동안 받았다. OSS는 이들을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등지로 데려가 실제로 가상 침투훈련을 실시하였고 2만 달러를 들여 침투용 잠수정을 제작해 훈련에 사용했다. 목포와 구월산 등지를 침투 대상으로 선정한 미 해군은 한국의 삼천포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한인 어부 3명을 납치해 지형과 정세 정보를 상세히 파악하기도 하였다.
결과
OSS의 냅코프로젝트에 대해 중국 전구 OSS는 한국 선점의 공이 냅코팀에 빼앗길 것을 두려워했고 특히 냅코의 실패로 독수리작전이 차질을 빚지 않을까 염려했다. 한편 냅코팀이 중국을 거쳐 함경남도로 침투하기 위해서는 중국전구 OSS와 미군사령부의 협조가 필요했지만 이 역시 관할권을 둘러싼 이견대립으로 쉽게 해결되지 못했다. 그리고 태평양에서 잠수함으로 한반도로 침투할 경우 태평양을 관할하는 니미츠제독의 태평양함대가 냅코팀을 한국 연안까지 잠수함으로 이동시켜 주면 잠수정을 타고 한국으로 침투할 예정이었지만 이 또한 맥아더 사령부나 니미츠제독의 승낙이 필요한데 쉽게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냅코작전사령탑은 중국의 독수리작전사령탑과 긴밀한 공조관계를 유지하면서 설득하였고, 마침내 8월 냅코프로젝트가 독수리작전에 앞서 시작하려는 차에 일본의 패망 소식으로 모든 작전이 종료되었다. 미군에 입대한 재미 한인들은 1945년 9∼10월에 제대하였고, 포로 출신의 한인 6명은 아무런 보상이나 대가도 없이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이송된 후 귀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냅코프로젝트는 OSS가 중국에서 한국광복군과 함께 전개한 ‘독수리작전’과 함께 대표적인 한반도침투작전이다. 장석윤이 1944년 7월 참여하면서 시작된 후 1945년 6월 최진하가 참가할 때까지 4개의 침투조로 편성되어 8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한반도 침투의 필요성이 사라지면서 냅코프로젝트는 종결되었고, 동년 9월 훈련에 참가한 한인들은 해산되었다.
냅코프로젝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불승인 정책을 전개한 미국이 재미 한인들을 이용해 한반도침투를 수행하기 위해 만든 군사 특수작전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대일전을 승리로 종결시키기 위한 OSS의 특수작전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작전에 참여한 각 개별 한인들은 한국 독립을 얻기 위한 절실한 염원 때문에 생사를 넘나든 모험을 각오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던진 한국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민주와 자유의 나라인 미국에서 평온하고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조건에 있었지만 조국의 독립에 이바지 하겠다는 강렬한 독립정신이 없다면 이런 모험에 재미 한인들이 투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냅코프로젝트는 미국의 기획과 지휘에도 불구하고 재미 한인의 강력한 항일무장 독립운동으로 평가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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