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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참성단 "마니산 제천단" "마니산 참성단"

ko.konene 발행일 : 2019-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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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제1의 성적()으로, 마니산 제천단()이라고도 한다. 참성단에 관한 기록은 고려 때의 문헌 여러 곳에서 이미 나타난다. 고려 후기에 이암()이 엮었다는 단군조선의 연대기인 『단군세기()』에는 “…이 분이 단군이다. …제천단을 쌓고(강화도 마니산에 있음.) 삼랑성()을 쌓으시다(성이 강화 전등산에 있고 세 아들을 보내어 쌓았기 때문에 삼랑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시대 학자 이종휘()의 시문집인 『수산집()』의 「동사()」에는 “제천단은 강화도 마니산에 있으니, 단군이 혈구(: 강화의 옛 이름)의 바다와 마니산 언덕에 성을 돌리어 쌓고 단을 만들어서 제천단이라 이름하였다. 단은 높이가 17척인데 돌로 쌓아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다. 위의 네모는 각 변이 6자 6치요 아래는 둘레가 60자이다. 혹자에 의하면 마니는 강과 바다의 모퉁이라, 땅이 따로 동떨어지고 깨끗하며 고요하여 신명()의 집이 된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제천단에 관한 본래의 연혁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문헌비고』에는 “고려 고종 46년에 교서랑() 경유()가 말하기를 ‘대궐을 마니산에 세우면 가히 나라의 복조()를 늘게 하리라.’ 함에 명령하여 이궁()을 그 산 남쪽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639년(인조 17)에 개수축()하였으며, 1700년(숙종 26)에 또 개수축하여 비를 세웠는데, 그 비문에 “동녘땅 수천리 전체를 둘러서 강도()가 보장지중지()가 되고, 강도 수백리 전체를 둘러서 마니가 으뜸가는 명산이라. 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드니 이른바 참성단이라. 세상에서 전하되 단군께서 쌓아 제단으로 하여 한얼께 제사지낸 곳이라 하니, 돌이켜보건대 오랜 연대가 흘러 비바람에 깎이고 허물어져서 서북쪽 태반이 무너지고 동쪽 층계가 또한 많이 기울어져서…선두포별장() 김덕하()와 전등사총섭() 승 신묵()이 주로 맡아 고쳐 쌓으니 20일 만에 일을 마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참성단이라는 명칭이 붙은 내력과 여러 번 고쳐 쌓은 일을 알 수 있으며, 제천단에 대한 선인들의 뜻이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여러 번 고쳐 쌓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국가제사의 제단으로 활용되었다. 참성단 제사로는 임시제와 정기제가 있었다. 임시제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이를 해결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치러졌고, 정기제는 매년 봄과 가을에 거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정기적 제사의 목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찾아볼 수 없지만, 국가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것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참성단의 제사는 조선시대의 대부분의 국가의례가 유교식 의례였던 것과는 달리, 도교의례 중 초제였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참성단에서 초제가 베풀어진 것은 고려시대부터 확인된다. 1264년(원종 5)에 거행된 것도 국왕의 친초였고, 공민왕 때 문신 경복흥()이 마리산 참성에서 초제를 지냈다는 기록과 1379년(우왕 5년) 사신을 보내어 마니산에서 초제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화 참성단 [江華塹星壇]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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