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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목사, 그 치열했던 삶.

ko.konene 발행일 : 2019-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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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7월 26일 평남 강서군(江西郡) 증산면(甑山面) 오흥리(吳興里)에서 손형준(孫亨俊)과 오신도(吳信道)의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호는 해석(海石)이며, 자는 호건(浩乾)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888년 6살때부터 향리의 사숙(私塾)에서 17살이 될 때까지 한학(漢學)을 수학하며 관리의 길을 지망하였다. 1895년 13살 나이에 같은 동리 박용(朴鏞)의 맏딸이며 두 살 연상인 박신일(朴信一)과 결혼하였다.

손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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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관리임용시험에 응시할 생각으로 평양으로 가는 도중 평양 교외에 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조목사집에 유숙하며 그로부터 서구의 문화와 기독교 교리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이는 신학문에 대한 동경과 기독교를 통한 새로운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상투를 자르고 관리가 되기를 포기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집에서 쫓겨났다. 이후 조목사의 소개로 평양주재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文約翰, John. Z. Moore)을 만났다.

문요한의 비서 겸 한국어 선생으로 있을 때 그의 추천으로 1903년에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 입학하였다. 아내 박신일도 평양 기흘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며 가정을 돌보았다. 1907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908년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중퇴하였다.

1909년 6월에 진남포와 삼화구역의 전도사로 파송되어 사역하고 신흥리교회 담임을 맡았다. 1910년 5월 서울 정동제일 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청국선교사’로 임명되었다. 7월에 중국어를 익힐 목적에서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갔다가 신민회의 일원으로 파견된 조성환(曺成煥)을 만났다.

1911년 봄 감리교 연회에 참석차 귀국해, 그해 4월 『그리스도인 회보』에 투고한 「기독교인의 자신력(自信力)」이라는 글에서 “기독교인들은 남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력으로 행복을 향유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도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각 성도들 스스로의 믿음으로 발달해야 한다”라고, 기독교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자신감을 가질 것을 역설하였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205XX79100135

 

손정도

1882년 7월 26일 평남 강서군(江西郡) 증산면(甑山面) 오흥리(吳興里)에서 손형준(孫亨俊)과 오신도(吳信道)의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호는 해석(海石)이며, 자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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